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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중구

단재 신채호

연혁

단재 신채호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님께서는 고종17년(1880) 12월 8일 중구 어남동 233 번지에서 부 광식(父 光植)과 모 밀양박씨(母 密陽朴氏) 사이 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때 아버지는 32세였고 형 재호(兄 在浩)는 8세였습니다.
본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浪城) 지방에 고령신씨들이 오랫동안 세거 (世居)해 왔으나 아버지가 외가인 안동권씨 묘막(墓幕)으로 이사와 살면 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낳았습니다.

이곳은 도림동(桃林洞 : 일명 도리미)을 비롯한 세 마을이 합쳐 어남리(於南里)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대둔산이 역(逆)으로 뻗어 대전 보문산에 이르는 가파른 줄기들이 이어진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지금도 민가가 몇집 안되는 외딴 골짜기 마을입니다. 묘막이었던 생가가 위치한 곳은 모양이 새둥지 처럼 깊은 산골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봉소(鳳巢)골이라고도 부릅니다.

단재선생께서는 7살때까지 산속 외딴집에 살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찌들은 생활을 했습니다.

단재선생은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叔舟)의 18대손(孫)으로 그의 집은 대대로 청원군 일대에서 세거(世居) 해왔습니다. 단재선생의 증조부 명휴(命休)는 벼슬이 첨추(僉樞 : 정3품)에 올랐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 났습니다. 조부(祖父) 성우(星雨)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 정6품)을 지내는 등 사족(士族)의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침탈과 국정의 혼란은 단재의 가문까지 영향을 미쳐 아버지대(代)에 와서는 가세(家勢)가 완전히 기울어져 몰락한 선비로 탈바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향(先鄕)을 등지고 외가(外家)선산(先山)이 있는 어남동의 묘막으로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단재의 아버지 광식 (光植)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되자 시신을 고향에 모시고 어머니 박씨도 큰아들 재호(在浩)와 함께 집안이 모여사는 낭성으로 다시 이사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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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의 일생

일제 강점기에 언론인, 역사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웠던 분으로 선생은 1880년 충남 대덕구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의 외가에서 태어나서 8살이 되던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 래리로 이사했습니다.

이렇게 대전과 충북에 생전의 흔적을 남긴 단재 선생께서는 1898년 성균관 입학을 위해 상경한 후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사학자로 문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905년 황성신문에 논설을 게재하기 시작한 단재선생께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한국자치제의 약사" "한일합병론 자에게 고함" 등의 시론과 "독자신론" "수군제일 위인 이순신전"등 역사관계 논문 등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단재 선생께서는 이당시 발표된 역사관계 논문을 통해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의 민족주의 사관을 드러내기 시작 했습니다.

이같은 언론활동과 더불어 단재선생은 양기탁, 이동녕, 이회영, 이동휘, 안창호 등과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가담했습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 단재선생께서는 윤세복, 이동휘, 이갑등과 광복회를 조직했고 만주에서 생활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했습니다. 이당시 단재선생께서는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 적지를 돌아보면서 부여, 고구려, 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단재는 임시의정원의원으로 활동했고 1922년에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해 에 가서 23년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 발표했습니다.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 한 이선언은 일제의 침략의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 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단재선생 의 민족주의 이념에 대한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1920년대는 단재의 역사적 역량 이 가장 크게 발휘되던 시기로 이 시기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등을 집필했습 니다.

이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던 단재선생은 1928년 5월 대만에서 체포되어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 복역하던중 1936년 2월 21일 57세를 일기로하여 뇌출혈로 옥중 순국하셨습니다. 유해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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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리 담당부서 : 총무국 > 문화체육과 > 축제담당 연락처 : 042-606-6292 최종수정일 : 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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